지금 업계 전반에서 가장 많이 회자되는 키워드가 무엇인지 묻는다면, 아마도 '기술 자립'일 겁니다.
마치 외부의 제약 요인들이 마치 거대한 벽처럼 우리를 가로막고 있고, 이 벽을 허무는 유일한 열쇠가 오직 내부 역량에 달려있다는 식의 서사가 지배적이죠.
물론, 미국을 필두로 한 선진국들의 첨단 기술에 대한 수출 통제와 자본 통제가 현실적인 제약이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핵심 부품이나 첨단 소재의 수급 경로가 갑자기 꼬이면서, 과거의 글로벌 공급망에 대한 의존도가 곧 취약점으로 직결되었다는 분석은 설득력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자립'이라는 단어에 너무 많은 무게와 긍정적 해석을 싣고 있는 건 아닌지, 한 번쯤 냉정하게 의심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모두가 '자립'을 외칠 때, 우리가 놓치고 있는 변수는 바로 '글로벌 표준과의 괴리'라는 지점입니다.
단순히 국산화율을 높이는 것과, 이미 전 세계가 수십 년간 쌓아 올린 최고 수준의 상호 운용성과 규격화된 생태계를 단기간에 대체하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입니다.
마치 전 세계가 사용하는 표준화된 언어를 갑자기 우리만의 방언으로 바꾸는 것과 비슷합니다.
기술적 난이도만 놓고 보면, 단순히 부품을 '만드는 것'을 넘어, 그 부품이 글로벌 시스템 내에서 '어떻게 작동하고 인정받을 것인가'라는 거대한 소프트웨어적 문제가 걸려 있는 겁니다.
이 과정에서 정부 주도의 대규모 R&D 투자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건 알지만, 그 투자가 과연 시장의 수요와 기술적 필요가 아닌, 지정학적 필요에 의해 과도하게 집중되는 영역은 없는지 비판적으로 바라봐야 합니다.
더 나아가, 이 논의의 초점이 기술력 확보에만 머물러 있다는 점도 문제입니다.
보고서들이 강조하는 '규제 컴플라이언스' 역량 강화라는 부분은 매우 중요하지만, 이 역시 또 하나의 거대한 '규제 장벽'을 스스로 만들어내는 행위일 수 있습니다.
해외 자본 유출입에 대한 까다로운 심사나 데이터 보안 규정 준수라는 것은, 기업들이 본질적인 혁신 동력 대신 '규제 준수'라는 행정적, 법률적 방어막을 구축하는 데 자원을 낭비하게 만들 위험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즉, 기술 개발의 속도와 방향성이 외부의 규제 예측 및 대응이라는 거대한 오버헤드에 의해 제약받는다는 것이죠.
게다가 '독자적 가치 사슬 구축'이라는 목표는 듣기엔 웅장하지만, 그 이면에는 '어떤 종류의 가치 사슬'을 구축할 것인지에 대한 명확한 정의가 빠져 있습니다.
과거의 성공 방정식이 '글로벌 연결성'이었다면, 이제는 '내부 순환성'을 최우선 가치로 두게 되면서, 혁신의 방향 자체가 '최적화'에서 '안정화'로 급격하게 틀어지고 있습니다.
이 변화의 흐름을 단순한 '위기 대응'으로만 해석하는 것은 너무 단순한 접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