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완벽하게 매끈한 안정성 뒤에 숨겨진, 손때 묻은 우연의 매력에 대하여 요즘 들어 문득 이런 생각을 많이 하게 돼요.

    완벽하게 매끈한 안정성 뒤에 숨겨진, 손때 묻은 우연의 매력에 대하여
    요즘 들어 문득 이런 생각을 많이 하게 돼요.

    뭔가 완전히 새로운 시스템이나, 혹은 너무나도 완벽하게 다듬어진 결과물을 접할 때마다 느끼는 감정의 변화 같은 거요.
    예전에는 그 ‘설정’ 자체를 만지는 과정에서 오는 짜릿함이 너무 좋았거든요.

    마치 커다란 레고 블록 세트를 처음 상자에서 꺼내서, 설명서가 없어도 이것저것 끼워 맞추면서 '내가 이걸 이렇게 작동시키면 어떨까?' 하고 온갖 가설을 세우고 돌려보는 그 행위 자체가 일종의 오락이었달까요.
    그 과정에서 생기는 예측 불가능한 오작동, 예상치 못한 조합으로 인해 터져 나오는 의외의 결과물들.

    그런 '만지작거리는 재미'가 주는 쾌감은 정말 중독적이에요.

    마치 어릴 때 만지던 장난감처럼, 모든 부품이 나에게 주어진 거라 생각하고 이것저것 분해해보고, 다시 맞춰보는 그 과정에서 오는 성취감 같은 게 있었거든요.

    그 시기에는 '완벽하게 작동하는 것'보다 '내가 얼마나 깊이 파고들어 저질러볼 수 있는가'에 더 큰 흥미가 끌렸던 것 같아요.
    시스템의 근본 구조를 들여다보면서, 이 부분이 왜 이렇게 설계되었는지, 혹은 만약 이 부분을 건드리면 어떻게 될지 같은 일종의 '지적 유희'에 빠져 사는 기분이랄까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우리 삶 자체가 점점 더 매끈해지고 안정적이 되면서, 그 '설정 만지는 재미'에 대한 갈망이 어느새 '믿을 수 있는 안정성'에 대한 안도감으로 바뀌어 버린 건 아닌가 싶기도 해요.

    솔직히 말해서, 너무 예측 불가능한 건 피곤하잖아요.
    출퇴근길 지하철이 항상 제시간에 도착하고, 내가 주문한 물건이 정확히 그날에 도착하는 것.
    이런 안정성이 주는 평화로움은 정말 엄청난 가치예요.
    이 안정성 덕분에 우리는 복잡한 고민 없이도 일상이라는 큰 그림을 꾸려나갈 수 있게 된 거죠.

    하지만 문득 생각해보니, 너무 매끈하게 돌아가는 세상은 어딘가 너무 '정제된' 느낌이랄까요?

    마치 필터가 너무 강하게 먹힌 사진처럼, 가장 날카롭고, 가장 엉뚱하고, 가장 손때가 묻어서 약간의 얼룩까지도 멋으로 포용해버린 '우연의 가능성' 같은 게 사라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 약간의 삐걱거림, 설명서에는 없지만 나만 발견한 비밀스러운 작동 방식 같은 것들이요.

    그게야말로 우리가 놓치고 사는, 가장 인간적이고 따뜻한 매력이 아닐까 싶어서요.

    완벽한 안정성이라는 쾌적함 뒤에는, 나만의 방식으로 발견하는 약간의 삐걱거림 같은 우연의 가능성이 가장 큰 매력으로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