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만성 피로가 아닌, 오후 3시의 ‘시스템적 지연’ 같은 낯선 피로감에 대하여 몸이 아프거나 잠을 못 자서 생기는 그런 종류의 피로는, 적어도 내가 뭘 잘못했는지 원인이 명확해요.

    만성 피로가 아닌, 오후 3시의 ‘시스템적 지연’ 같은 낯선 피로감에 대하여
    몸이 아프거나 잠을 못 자서 생기는 그런 종류의 피로는, 적어도 내가 뭘 잘못했는지 원인이 명확해요.
    어제 너무 늦게 잤나, 주말에 과음했나, 아니면 며칠 동안 너무 무리했나.

    이런 건 몸이 보내는 비교적 명확한 경고등 같은 느낌이잖아요.

    그런데 요즘 제가 느끼는 피로감은 좀 달라요.
    이건 마치 전기가 불안정하게 들어오는 아파트의 누전 차단기 같은 느낌이랄까요.

    물리적으로 무언가를 끌어안고 고생한 게 아니거든요.

    그냥 자리에 앉아 모니터만 바라보고 있는데, 갑자기 머릿속 회로가 뚝 끊긴 듯한 '지연' 현상이에요.
    아침에는 '오늘도 해내야지!' 하는 의욕으로 하루를 시작하는데, 점심 먹고 나면 갑자기 뇌가 마치 낡은 컴퓨터처럼 버벅거리기 시작하는 거죠.

    중요한 회의 중에도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이 문장이 논리적으로 연결되고 있는지에 대한 확신이 뚝 떨어져요.
    머릿속에서 수많은 정보들이 서로 부딪치면서 생기는 일종의 마찰열 같은 건데, 이걸 '번아웃'이나 '피로'라는 단어 하나로 묶어 설명하기가 너무 애매해서, 그냥 '시스템 오류' 같은 느낌으로 표현하게 되더라고요.
    이런 '시스템적 지연'은 단순히 수면 부족의 문제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혹시 우리가 너무 많은 정보를 너무 짧은 간격으로 처리하느라 뇌가 과부하 상태에 놓인 건 아닐까요?

    예를 들어, 오전에는 A 프로젝트의 기획서 초안을 작성하느라 특정 논리 구조에 깊이 몰입하다가, 점심시간 직후에 갑자기 B 팀장님과의 갑작스러운 전화 통화로 맥락을 전환해야 할 때 말이에요.
    이 두 가지 완전히 다른 종류의 사고 모드를 뇌가 너무 급하게 스위치 온/오프 하기를 반복하다 보니, 마치 여러 개의 앱을 동시에 띄워놓고 백그라운드에서 무한 새로고침을 하는 것 같은 상태가 되는 것 같아요.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에너지가 너무 크거든요.
    마치 고성능의 최신 스마트폰을 쓰는데, 배터리 잔량은 50%인데도 불구하고, 백그라운드에서 10개의 앱이 동시에 업데이트를 시도하는 상황과 비슷해요.

    결국 겉보기엔 괜찮아 보여도, 내부의 프로세서가 과열되면서 '잠시만요, 재부팅이 필요합니다'라는 신호를 보내는 느낌이랄까요.
    이 상태가 지속되다 보니, 뭘 해도 깊은 몰입이 어렵고, 결국은 '오늘은 그냥 아무것도 안 하는 게 최선일지도 몰라'라는 자기 합리화의 영역으로 흘러가게 되는 것 같아요.
    이 묘한 공허함과 몽롱함이 저를 가장 괴롭히는 지점인 것 같습니다.

    우리가 느끼는 피로는 단순히 육체적인 에너지 고갈이 아니라, 정신적 맥락 전환과 정보 처리 과정에서 발생하는 일종의 인지 부하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느끼는 낯선 피로는 종종 물리적 고갈보다는 뇌가 과부하된 정보 처리 과정에서 오는 시스템적인 지연의 신호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