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한 사건 없이도 충분히 채워지는 무심한 시간의 질감이 필요하다.
(feat.
현대인의 영혼 배터리 방전 상태)
요즘 들어 부쩍 '무엇이 부족하다'는 느낌을 받곤 해요.
그런데 그 부족함의 실체가 뭘까 곰곰이 생각해보면, 사실은 '에너지가 고갈된 상태'라기보다는 '정신적 완충지대'가 필요한 느낌에 가깝더라고요.
마치 배터리가 10% 남았는데, 그 10%를 써서 뭘 해야 할지 모르는 그런 상태랄까요?
큰일을 치르거나, 엄청난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건 아니에요.
오히려 오늘 하루가 '평범해서' 더 지치는 기분이랄까요.
출퇴근길에 이어지는 지루한 대화들, 끝없이 쏟아지는 이메일의 알림들, 그리고 모두가 '괜찮다'고 말해야 하는 그 미묘한 사회적 가면 뒤에 숨어있는 에너지 소모가 만만치 않아요.
어느 날은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멍 때리고 싶을 때가 많아요.
목적지도, 성과도, 남들에게 보여줘야 할 감정의 깊이도 필요 없는, 그저 시간 자체가 투명하고 부드러운 질감으로 흘러가 버렸으면 좋겠어요.
주말에 뭘 '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리기도 하고, 주말이 끝나가면서부터 오는 일종의 '미래에 대한 기대감의 피로' 같은 것도 있고요.
이런 사소하지만 만성적인 피로감은, 마치 몸이 아픈 것보다 더 막연하고 잡기 힘들어서 오히려 더 괴로운 것 같아요.
그래서 요즘 제가 가장 간절하게 바라는 게 바로 그 '무심한 시간'이에요.
뭔가 거창한 경험이 아니어도 괜찮아요.
예를 들어, 아무런 맥락 없이 오래된 골목길을 천천히 걸으면서, 가게마다 걸린 오래된 간판의 글자체만 유심히 관찰하는 그런 시간 같은 거요.
혹은 그냥 창가에 앉아서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이나, 나뭇잎이 바람에 떨어지는 각도만 멍하니 바라보는 시간 말이에요.
이런 시간들은 '뭔가 성취해야 한다'는 의무감에서 벗어나게 해주거든요.
마치 뇌에 강제로 '일시 정지' 버튼을 누르는 느낌이랄까요?
이런 시간을 가지면, 내가 나 자신에게 너무 많은 기대를 걸고 살았다는 걸 깨닫게 되기도 해요.
남들의 기준에 맞춰 살거나, 혹은 나 스스로 너무 높은 기준을 세우느라 에너지를 낭비했던 거죠.
결국 필요한 건 엄청난 자극이나 폭발적인 행복이라기보다, 이 복잡한 현대 사회의 소음 속에서 잠시 '나'라는 존재만으로도 충분히 존재할 수 있음을 확인시켜주는, 아주 평온하고 꾸밈없는 배경 소음 같은 시간인 것 같아요.
가장 필요한 회복은 거창한 이벤트가 아닌, 아무 목적 없이 흘러가는 시간의 평온한 질감 속에서 찾아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