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비 스펙만 쫓다가, 정작 나만의 감각과 여백을 잃어버린 경험에 대하여
요즘 들어 장비를 사면서 느끼는 감정의 기복이 정말 심하다.
예전에 저도 그랬다.
뭔가 새로운 걸 알아내면, 그 제품이 가진 최신 스펙표를 쫙 펴놓고 나 자신을 설득하곤 했다.
'이 정도 성능이면 이건 무조건 사야 해', '이 수치 하나만 보면 현존 최고지'라면서 말이다.
심지어 남들이 '이거 써봤냐?'라고 물어보면, 내가 찾아본 최신 기사나 유튜브 리뷰에서 본 수치들을 나열하는 데 급급했다.
픽셀 수, 주사율, 전력 효율, 무게 배분 같은 단어들이 마치 나를 지적인 소비자처럼 포장해주는 것 같았다.
하지만 막상 그 비싼 장비를 들고 나갔을 때, 그 스펙들이 나에게 주는 '만족감'은 생각보다 공허했다.
마치 엄청나게 큰 공허함을 억지로 채우려고 노력하는 느낌이었다.
결국 장비라는 것은 그 자체로 목적이 되기 쉬운데, 내가 왜 이 장비를 원하는지, 이 장비가 나의 어떤 ‘사유’나 ‘감각’의 빈 공간을 메워주길 바라는 건지, 그 본질적인 질문을 건너뛰고 기능 목록만 체크하는 데 너무 많은 시간을 낭비했던 것 같다.
돌이켜보면, 장비의 스펙이라는 건 결국 '잠재적인 가능성'을 숫자로 환산한 것에 불과하다.
하지만 내가 정말 필요로 하는 건 그 잠재력의 최댓값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나의 작업 흐름(Workflow) 속에서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나를 방해하지 않는 '여유'다.
예를 들어, 사진 장비를 예로 들자.
최고 화소수가 찍는다는 건 멋지지만, 그 무거운 바디와 복잡한 인터페이스 때문에 오히려 내가 담고 싶은 그 찰나의 순간에 집중하지 못하게 만드는 경우가 너무 많았다.
오히려 조금 투박해 보이지만, 가볍고 직관적이어서 손에 착 감기는 느낌, 즉 '만져지는 감성'이 나에게는 그 어떤 최신 렌즈보다 더 큰 '여백'을 주었다.
이 여백이란, 기술이 나를 대신해서 무언가를 처리해준다는 안도감이라기보다는, 기술의 존재 자체가 나를 둘러싼 외부의 소음으로부터 잠시 분리시켜 '나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는 정신적 공간'을 확보해주는 느낌에 가깝다.
결국 좋은 장비란, 나라는 사용자의 고유한 리듬을 방해하지 않고, 마치 오래된 친구처럼 곁에 조용히 있어주면서, 내가 평소에 생각하지 못했던 새로운 방향으로 시선을 돌리게 만드는 일종의 '촉매제' 같은 역할을 해야 하는 것 같다.
너무 많은 기능은 오히려 하나의 매력적인 단점을 만들어낸다.
그 단점조차도 내가 의도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나의 취향'으로 흡수되는 장비가 최고의 장비일 것이다.
비싼 돈을 주고 사서, 나중에 '이게 정말 나한테 필요했나?'라는 질문을 던지게 만드는 장비는, 아무리 스펙이 좋아도 결국 내게는 짐이 되어 돌아올 수밖에 없다.
장비를 선택한다는 것은, 결국 나 자신과의 가장 사적인 대화의 과정이 아닐까 싶다.
장비의 스펙표를 들여다보기보다, 실제로 사용하며 나의 감각과 사유가 머무를 수 있는 고요하고 넓은 '여백'을 발견하는 데 집중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