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술의 변곡점마다 반복되는 '필수적'이라는 환상에 대하여

    요즘 기술 생태계를 들여다보면, 마치 모든 것이 인공지능이라는 거대한 물줄기에 휩쓸려 가는 듯한 인상을 지울 수 없습니다.
    마치 이 기술이 이제는 선택이 아니라, 존재의 근본 전제가 되어버린 것처럼 말입니다.

    과거에도 그랬습니다.
    인터넷이라는 거대한 흐름이 모든 산업의 지형을 바꾸었고, 그 변화의 파도에 올라타지 못한 기업들은 마치 시대에 뒤떨어진 유물처럼 취급받곤 했죠.
    지금의 생성형 AI 열풍 역시 그 거대한 흐름의 최전선에 서 있는 듯 보입니다.

    초기 단계의 혁신가들이 모이는 가속기 프로그램의 최신 기수들을 살펴보면, 그 안에서 AI를 핵심 동력으로 삼거나, 아니면 최소한 AI를 활용한다는 명목을 전면에 내세우는 기업들이 눈에 띄게 많습니다.
    이는 단순히 '새로운 기술을 도입했다'는 차원을 넘어, 마치 이 기술이 곧 비즈니스 모델 그 자체인 양 포장되는 경향을 보입니다.
    물론, 이 현상을 단순히 '과열'이라고 치부하기는 어렵습니다.

    벤처 캐피털이라는 거대한 자본의 흐름이 특정 기술에 집중될 때, 그 자본의 중력은 필연적으로 가장 눈에 띄는 곳으로 모든 아이디어를 끌어당기기 마련이니까요.
    마치 과거 닷컴 버블 때 모든 것이 '인터넷 기반'이어야만 가치가 있다고 여겨졌던 시대의 문화적 코드가, 지금은 'AI 기반'이라는 새로운 코드로 치환되어 작동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지금, 기술적 변혁의 순간마다 반복되는, '이것 아니면 안 된다'는 일종의 집단적 불안과 욕망을 목도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현상을 좀 더 깊이 들여다보면, 기술의 발전 속도 자체가 창업가 정신의 속성을 어떻게 변형시키고 있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스타트업이라는 조직 자체가 본질적으로 '미완성된 로드맵' 위에 서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들은 끊임없이 외부의 트렌드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방향을 틀거나, 혹은 트렌드 자체를 만들어내야 하는 숙명을 지니고 있죠.
    AI라는 거대한 물결 앞에서, 과거 Web3나 핀테크가 그랬던 것처럼, 이 새로운 기술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삼는 것은 가장 빠르고 확실한 생존 전략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실제로 AI를 활용해 고객 서비스 챗봇을 만들거나, 특정 규제 준수 여부를 검토하는 등, 기존의 비즈니스 프로세스에 AI를 '덧붙이는' 방식의 성공 사례들이 분명히 존재합니다.
    이들은 정말로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고 있는 것이 맞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이 과정에서 '바퀴를 재발명'하는 수준에 머무르는 경우도 만만치 않습니다.

    이미 존재하는 기능을 AI라는 이름표만 붙여 재포장하는 경우들이죠.
    이는 기술 자체가 아니라, 그 기술을 둘러싼 '서사(Narrative)'가 가장 큰 자산이 되어버린 현대 소프트웨어 시장의 단면을 보여줍니다.

    결국, 어떤 기술이 혁신적인가라기보다는, 그 기술을 통해 어떤 새로운 '사용자 경험의 서사'를 구축하고, 그 서사에 투자자들이 감정적으로 동참하게 만드는지가 더 중요한 문화적 코드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 거대한 흐름 속에서, 진정으로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본질적인 혁신이 무엇인지, 아니면 단지 가장 화려한 기술적 포장지에 포장된 다음 유행이 무엇인지 분별하는 것이 가장 어려운 과제가 되어버린 것이 아닐까요.